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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이야기 1: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가들기독교교육정보 2024. 2. 12. 09:03
16세기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었지만 그 이전에도 이미 많은 개혁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 안에 있으면서 로마 가톨릭을 개혁하려 했다. 루터 이전에 활동했던 종교 개혁가들을 살펴봄으로써 종교개혁이라는 강물의 근원을 알아보고자 한다.
* 이 글은 권혁익님의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교회의 역사"에 나오는 내용을 발췌하여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종교개혁의 배경
교회는 순수한 복음 전파와 올바른 성례의 집행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로마 가톨릭은 스스로 보편교회(catholic)라고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떠나 있었다. 따라서 로마 교회의 교리는 순수한 복음과 올바른 성례의 집행이 이루어지던 사도적 교회와 멀어졌고 오히려 교회의 전통과 사람의 전통을 우위에 두면서 교황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했다. 14세기 오컴에 의해 '유명론'이 유행하면서 교황권은 세속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중세 로마 가톨릭의 신학은 교부들의 신학을 이성으로 사유하고자 하는 스콜라주의 철학이었다. 스콜라주의는 실재론(實在論)을 근거로 강고한 사상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실재론은 보편적인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또 '보편적인 것은 개별적인 사물들보다 선행한다'라고 믿었다. 만일 개별 사물들보다 앞선 보편적인 것이 없다면, 우주에는 '오만가지 잡다한 것들의 와글거리는 혼란'만 있게 될 뿐이다. 따라서 보편적인 존재의 실재를 인정해야만 이성적이고 질서 정연한 우주관을 정립할 수 있다. 중세 대표적인 실재론자로는 안셀무스(1033~1109년), 상포의 기욤(1070~1121년) 등이 있다. 이들 실재론자들에 의하면, 보편적인 실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인 삼위일체론, 교회론, 원죄론을 제대로 확립할 수가 없다. 보편적 인간, 보편적 원죄를 부인하면 개별적 인간, 각자의 죄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반면, 유명론(唯名論)이라는 상반된 철학 사조도 존재했다. 보편적인 것은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유명론이다. 이 이론은 힘을 얻지 못하다가 중세 말기인 14세기 잉글랜드의 윌리엄 오컴(약 1287~1347년)에 의해 다시 주창되면서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유명론의 입장에 따르면, 삼위일체 교리에서도 삼위의 개별적인 실체만이 실재하는 것이고, 삼위 모두를 포괄하는 보편적인 신성은 말 그대로 유명무실(有名無實)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아담을 보편적 인간으로 보는 것도, 아담의 죄를 모든 인간의 보편적 죄로 간주하는 것도, 심지어 그리스도를 두 번째 아담으로 간주하면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한다고 주장하는 보편속죄론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러한 급진적 유명론은 중세 교회 교리의 근간을 흔들었기 때문에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고 따라서 로스켈리누스나 오컴은 로마가톨릭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출처: 한국기독공보(2020. 1. 23))
오컴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해내야 한다며 믿음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으며, 교회는 눈에 보이는 실재이기 때문에 교황보다 교회의 권위가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은 자신들의 교리를 더욱 발전시켜 급기야는 교황과 주교들을 중심으로 하는 '가르치는 교회'와 신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듣는 교회'로 교회를 분리시켜 버렸다.
종교개혁가들의 등장
발도인들
늦어도 12세기 이전부터 프랑스 동남쪽,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의 북쪽 끝 알프스 산맥에 면하는 산악 지역인 피에몽 계곡을 중심으로 로마 교회와 다른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던 개혁 교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과 사도적 교회의 순수성을 쫓아 스스로 고립을 택한 '발도인들'이었다. 발도인들은 유럽 전역으로 영향을 미치며 공동체를 발전시켰는데 대표적으로 '알비인들', '툴루즈인들', '피카르디인들'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잉글랜드의 존 위클리프(1320-1384)

잉글랜드에서는 위클리프가 태어나기 전인 1175년부터 이단 사상을 전한다는 이유로 발도인들과 발도인의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 존 위클리프는 프랑스에서 잉글랜드로 전해진 발도인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들로부터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뢰,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절대적 필요성(후에 예정론으로 발전시킴), 성경에서 도출한 신앙적 원리 등을 배웠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프랑스 왕의 세력 안에 있는 아비뇽측 교황을 지지하였고 신학적으로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진리에 따라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주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와 세상이 통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헤미아의 얀 후스(1369-1415)

보헤미아(체코의 전신)의 수도였던 프라하는 지정학적으로 유럽의 동서를 연결하는 관문역할을 하면서 새로운 문화와 타종교에 관대했다. 발도인들은 이러한 보헤미아에 집중적으로 정착해서 13세기 초에는 6만 명을 넘어섰다. 보헤미아의 카렐 4세가 왕이 된 1346부터 나라가 번성해지자 교회 또한 사치와 타락으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도인들은 모국어인 보헤미아어로 번역한 성경을 사용하며 성경에 근거한 복음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면서 보헤미아 교회에 자극을 주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사제들은 발도인들의 가르침을 이단시하며 핍박했다.
1382년 보헤미아 왕이었던 바츨라프의 누이와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의 결혼으로 두 나라 사이에 결혼동맹이 맺어졌다. 이를 계기로 두 나라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존 위클리프의 저서들이 얀 후스에게까지 전달되었다. 후스는 프라학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하며 위클리프의 논문을 정기적으로 읽었고, 성경과 교부들의 책, 보헤미안 개혁가인 마테이와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연구하면서 신학적 견해를 형성해 나갔다. 사제 서품을 받은 후에는 프라하에 있는 성 미할 성당에서 설교하면서 설교자로 인정받았다. 후스는 로마 교회의 오류와 부패를 지적하면서 내부적으로 정화하는 개혁을 주장했고 신구약 성경을 개정하여 대중들이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을 비판하면서 대주교와 갈등 상황을 맞이했고 사제들이 사욕과 성직 매매를 비판한 후에는 설교를 금지당했다. 프라하 주요 성당들에서 면벌부 판매가 시작되었을 때 이를 비판하여 구입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설교를 하였고 토론에서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칭하면서 면벌부 판매를 비판한 죄목으로 파문당했다. 결국 그는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화형에 처해졌다.
루터가 등장하기까지
위클리프와 후스의 가르침은 100여년 동안 유럽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바이에른, 슈바벤, 프랑코니아, 프로이센 등에서 수많은 지지자들과 제자들을 얻게 되었다.
토마 코넥트(1390-1433): 프랑스 카르멜회의 수도사-종교 개혁을 이끌었다는 죄목으로 1433년에 화형 당함.
로렌조 발라(1407-1457): 학자-교황의 오류 비판으로 화형선고받았지만 왕의 중재로 화형 면함.
앤드루 추기경(?-1484): 황제의 대사로 로마에 파견됨-교황의 성무 집행을 정지시키려다 감옥에 갇혀 옥사함.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 도미니크회 수도사-이신칭의를 선포한 죄로 화형 당함.
요한 푸퍼(요한 폰 고흐)(1400-1475):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 원장-토마스 아퀴나스를 '오류의 황태자'라고 비난했음.
요한 폰 베젤(1410-1481): 에르푸르트 대학의 신학박사, 보름스와 마인츠 대성당의 설교자-화체설과 사제들에 의해 구원이 통제된다는 교리 공격, 후스인들과 교류하며 이단 사상을 전한다는 죄목으로 옥에 갇혀 옥사함.
베셀 간스포트(1419-1489): 쾰른, 루뱅, 파리, 하이델베르크, 그로닝겐에서 신학박사로 활동-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파괴하는 자들에게 저항(resist)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함, 100년 후에 루터도 동의함. 면벌부, 고해성사, 교황주의, 성찬 등을 비판하다가 화형 당함.
존 힐튼(?-1502): 프란체스코회 수도사-교황권 남용 비판, 수도사들의 반종교적인 삶을 기록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어 20년 이상 감옥에 있다가 옥사.
요하네스 로이힐린(1455-1522):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능통, 라틴어 사전과 헬라어 문법 작성, 불가타 성경 교정, 최초의 히브리어 문법과 사전 출간.
루터
루터는 1510년경 에르푸르트 신학생 시절에 설교집을 통하여 후스의 사상을 처음 접하였고, 후스의 면벌부에 관한 주장에 큰 관심을 가졌다.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를 위한 성도들의 자정노력이었다. 하지만 교회는 자신들의 권위에 취해 성도들의 자정노력을 이단으로 취급하며 핍박을 가했다. 교회 안에서 교회의 정화를 외치던 성도들을 이단으로 몰기 위해 로마 가톨릭은 교회와 교황과 사제들을 위한 신학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반면 성경에 나타난 순수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갈망하던 성도들은 사도적 교회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사도적 교회의 교리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 두 거대한 흐름의 공개적, 공식적 만남이 루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16세기 종교개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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