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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이야기: 1세대 종교 개혁가들기독교교육정보 2024. 3. 18. 15:21
개신교 신학의 뿌리는 종교개혁이다. 보수적인 신학을 계승하려는 학파는 종교 개혁 신학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한다. 개혁된 신학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슬로건 아래서 신학이 종교 개혁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지킨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넘긴 지금도 500년 전의 신학을 유지하며 종교개혁 신학을 따르려고 노력한다. 루터와 동시대에 활동하던 개혁가들 위주로 그들의 활동을 찾아보고자 한다.
루터
1517년, 루터(1483-1546)가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당에 붙이면서 종교 개혁의 시작을 알렸다.
1521년 1월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파문당하면서 로마 가톨릭과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고 로마 가톨릭과 완전히 갈라섰다. 루터는 1521년 4월에 열린 보름스 의회에서 황제와 선제후들과 교황의 특사들 앞에서 “인간이 만든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극복하고 권위를 앞세운 억압을 양심의 자유”로 대항한 결과 이단자로 낙인찍혀 죽을 운명에 처했다. 당시 황제였던 카를 5세가 보름스 의회를 떠난 루터를 살해하려고 했으나 이를 안 작센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루터를 은밀하게 빼돌려 목숨을 구해 주었다. 이후 루터는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지지를 받으며 작센주의 비텐베르크에서 계속해서 개혁을 이끌어나갔다. 이때 농민들에 의한 급적적인 종교전쟁이 발생했는데 이 운동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부터 독일 지역에서 발생했던 농민 폭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독일의 농민들은 봉건적인 압제 속에서 국가와 귀족들의 횡포에 시달렸다. 종교개혁은 사회 저변에 깔려 있던 이 반란의 기류를 자극하고 그것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농민들은 신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민주적인 요소만 바라보며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과 봉건적 귀족 집단에 항거했다. 루터는 제후들과 귀족들을 책망하며 농민을 옹호했지만 점점 심해지는 농민들의 폭력에는 반대했다. 그는 혁명을 신적 질서를 거스르는 시도일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을 가로막는 악이라고 생각했다. 농민들에게 폭력을 멈추고 통치 권력에 복종할 것을 종용했지만 그들은 루터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루터는 성명서를 통하여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을 비난하였고 제후들은 루터의 성명서에 힘입어 농민들이 반란을 과도하게 진압했다. 루터는 이 일을 계기로 모든 종류의 혁명에 반대하며 세속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는 뜻을 천명했다. 보름스 의회 이후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에서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있었고 멜랑흐톤(1497-1560)은 루터가 없는 비텐베르크에서 그의 책 『신학총론』을 쓰고 있었다. 『신학총론』은 루터의 교정을 거친 뒤 1521년에 출판되었다. 루터가 독일 종교개혁의 토대를 놓았다면 멜랑흐톤은 종교개혁을 위한 신학의 골격을 구축했다. 이들은 서로의 견해를 존중하며 공유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멜랑흐톤의 신학이 루터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1534년 멜랑흐톤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설과 그리스도의 삶과 피를 입으로 먹는다는 견해를 완전히 버렸다.
부쳐
독일의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또 한 사람의 종교개혁가가 등장했다. 1518년에 벌어진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루터의 연설을 듣고 종교 개혁가가 된 마르틴 부처(1491-1552)였다. 그는 당시 독일의 영토였던 슈트라스부르크를 개신교 도시로 바꾸었으며 루터와 스위스의 츠빙글리 사이를 중재하기도 했고, 프랑스 개혁파 난민들을 돌보는 일도 했다. 이때 제네바에서 쫓겨난 칼빈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츠빙글리
취리히의 츠빙글리(1484-1531)는 스위스 글라루스주에 있는 가톨릭 교회의 사제가 되었지만 스위스인 용병을 반대하는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쫓겨난 후에 에라스무스가 라틴어로 번역한 신약 성경을 읽고 복음을 발견했다. 그 후에 그는 스위스 그로스뮌스터 대성당의 설교 담당 사제 자리에 지원하여 1518년부터 신약성경 연속 강해를 시작했다. 취리히시는 츠빙글리의 영향으로 개신교 도시로 변해갔고 1523과 1524년 사이에 있었던 세 차례의 논쟁에서 이긴 후에 로마 가톨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개혁 교회가 되었다.
재세례파
개혁한 교회 안에서 새로운 세례를 주장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스위스 형제단’이라 불린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l)과 그의 일파들은 성경의 단순성을 신봉하던 츠빙글리의 추종자였으며 츠빙글리와 함께 로마 가톨릭과 싸웠다. 이들은 성경에서 유아 세례에 대한 근거가 없으므로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에게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츠빙글리 또한 1523년 1월에 있었던 로마 가톨릭과의 1차 논쟁에서 세례를 받지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주장에 반대하기 위해 유아 세례를 받지 못한 아이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며 다소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콘라드 그레벨과 그의 일파는 1523년 10월 로마 가톨릭과 벌인 2차 논쟁에서 미사에 대한 결정을 시의회에 맡긴 츠빙글리의 결정에 불만을 품었다. 이들은 영적인 문제는 영적인 권위가 있는 교회에서 결정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유아 세례를 부정하던 이들은 교회의 개혁이 완성되자 교회와 국가의 단절과 함께 재세례를 주장하는 또 하나의 급진 개혁 세력으로 등장했다. 1524년 한 해 동안 급진적인 세력이 증가하자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막기 위해 취리히 시의회가 1525년 1월에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토론회는 유아세례를 옹호하는 츠빙글리의 승리로 끝이 나고 시의회는 태어난 지 8일 안에 유아에게 세례를 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레벨과 그의 일파는 시의회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서로에게 재세례를 베풀면서 재세례파의 등장을 세상에 알렸다.
루터, 멜란히톤, 부처, 츠빙글리는 사제 제도 자체를 배격하고 개개인의 신자들은 저마다 유일한 중보자인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간다는 만인 제사장론을 가르쳤다. 또한 이들은 미사의 제사와 화체설을 배격하고 평신도들에게 성찬의 잔을 나누어 주며 세례와 성찬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로 남겨두었다. 하지만 차이도 있었다. 루터는 세례를 베풀 때 중생이 발생한다고 믿었으며, 세례를 베풀 때 귀신 쫓는 의식을 거행해야 하며 성찬에서는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교리를 남겨 두었다. 반면 츠빙글리는 성례를 장차 받을 은혜의 수단이라기보다는 이미 받은 은혜의 상징이자 인침이라고 이해했다. 그는 세례시의 중생과 성찬에서의 육체적 임재를 부인하였다. 루터를 비롯한 독일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자들은 공재설을 인정하지 않는 츠빙글리와 오이클람파디우스, 부처 등 스위스의 개혁자들을 이단시했다. 다만 재세례파에 대해서는 한 목소리를 내며 재세례의 불필요성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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